아기가 가르쳐준 철학 -걷기 전에 뛰려 했던 나- 어느새 가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서 나의 시선은 책상 위 달력에 잠시 멈춰진다. 이제 남겨진 두 장의 달력,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다이어리를 펼쳐본다. 그동안의 기록들을 하나씩 따라가며 지나간 일들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한 해를 돌아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란 늘 아쉬움 투성이다.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이 작심 삼 일로 끝날 때마다 여린 내 마음은 더욱 무겁기만 하다. 마치 개학은 다가오는데 밀린 숙제가 남아 있는 초등학생처럼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지만, 못하는 이유에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없다고들 말한다. 나 역시도 그랬다. 그러나 ‘정말 시간이 없어서일까?’ 조용히 반문해 본다. 솔직히 말하면 시간이 없다는 말은 ‘하기 싫은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변명’에 불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고 싶지 않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인 것 같다. 아직 부족한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 못 하는 나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 그런 나의 모습이 보인다. 무엇이든지 처음엔 서툴러서 그것이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오로라를 꿈꾸는 70세 청년을 만났다 '참 멋있어!’ 그분을 뵐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헌혈 센터에서 근무하다 보면 비교적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20년 이상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얼굴만 보아도 나이를 가늠할 수 있지만, 가끔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 차이가 나서 놀랄 때도 있다. 오늘 만난 분이 그렇다. 건강에 누구보다 관심을 가질 나이지만 항상 활기찬 모습으로 헌혈을 정기적으로 해주시는 분이다. 내년이면 71세, 헌혈할 수 있는 나이가 만 69세까지니 더 이상 헌혈이 어렵다. 헌혈할 수 있는 날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오늘의 헌혈이 더 소중하다고 하신다.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그분과 이야기를 조금만 나누어 보아도 그가 가지고 있는 긍정에너지가 전해진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기분이 좋아진다. 헌혈하러 오실 때마다 인생의 선배로서 도움이 될 삶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데, 오늘은 여행을 가신다며 넌지시 말을 건넨다.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봐야 한다는 오로라를 위한 아이슬란드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여행을 준비하면서 체력이 정말 중요할 것 같다는 말을 강조하신다. 은퇴 후 삶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나는 물었다. “노년에
다시, 감사를 연습하다 5년 전 겨울이 다가옴을 알리는 찬비가 내리는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 웃을 때 이상해. 거울 좀 봐요." 아들이 말했다. "그래?" 거울 앞에서 웃음을 지어본다. 다소 어색해 보이는 표정, 한쪽 입 꼬리가 잘 올라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면서도 불편함이 있었지만, 대충 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했다. 회사에 일찍 도착한 나는 카페에 잠시 들러 커피 한잔을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들고 자리에 앉은 나는 여유로운 시간이 마냥 행복했다. 그런데, 빨대로 커피 한 모금 마시는데 이상하게 자꾸 옆으로 흘러내렸다.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하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하러 갔다. 얼굴 반쪽이 마비되어 음식은 흘러내렸고, 거울을 보니 나의 모습은 무척 낯설었다. 어떻게 병원을 찾아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내 귓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내 손에 쥐어진 많은 약 봉투만이 책상 위를 가득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6개월의 시간. 하루하루가 작은 전쟁이었다. 물을 마시려 하면 흘러내렸고,
해보기는 했어? 어느 날, 친구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너 해봤어?” 그 짧고 간결한 질문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말투로 다가왔다. ‘해봤어’라는 말 속에는 단순한 경험 이상으로 무언가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너 해봤어?’ 그 질문은 단순히 ‘어떤 일을 해본 적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다. 이 말의 시작은 고,정주영 회장의 어록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또한 어려운 순간, 갈등을 앞에 두고 있을 때면 내 인생의 네비게이션과 같이 항상 제 몫을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고단했던 시간을 견뎌내고,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때로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는지 묻는 말이다. ‘해봤다’는 3글자에 내포된 의미는 마치 인생의 굴곡과 성장의 흔적, 그리고 그 안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과 같은 것이다. 나는 ‘해봤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도전과 시도가 내 삶을 빚어왔다. 놀이동산에서 처음 높고 빠른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심장은 터질 듯 뛰었지만, 용기 내어 다시 앉았던 그 순간. 처음 ‘혼자’라는 이름 아래 여행을 떠났을 때, 길을 잃고 낯선 곳에서 헤매면서도 나 자신을 믿었던 그 시간
비우는 시간의 힘 옷장 문을 열 때마다 한숨부터 나온다. 언젠가 입겠지, 하며 버리지 못한 옷들. 비싸게 샀다고 억지로 걸어둔 원피스. 그런데 막상 입는 건 늘 비슷한 옷 몇 벌뿐이다. 토요일 오후. 잠시 정리하려고 했는데, 하나씩 꺼내다 보니 멈출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옷 산더미가 쌓였다. 이걸 내가 다 갖고 있었나 싶다. 결국 절반 넘게 버리고 나서야 마음이 후련했다. 옷장 안 옷들이 숨 쉬는 것 같았고, 나도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왠지 모르게 너무 좋다. 단순히 정리했다는 뿌듯함이 아니라, 뭔가 내 몸속까지 시원해지는 기분. 내가 일하는 헌혈의 집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명의 혈액을 본다. 투명한 백으로 흘러들어오는 빨간 혈액. 처음엔 그냥 다 똑같아 보이지만, 혈액 속 성분의 무게에 따라 층이 분리되면 보인다. 혈액마다 다르다는 것이. 어제도 그랬다. 30대 남자분, 혈소판 성분 헌혈 전 검체를 원심분리기로 돌렸더니 혈액이 뿌옇게 보였다. "어제 뭐 드셨어요?" 물었더니 역시나 회식이었다고 하셨다. 삼겹살에 소주. 무척 미안해하시는 표정, 괜찮다고, 다음에 다시 오시라고 했지만, 사실 묻고 싶었다. ‘이분은 오늘 처음일까, 아니면 매일 이런
행복의 그림자인 괴로움 “엄마….”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소풍날,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로 갈 수 없음을 안 초등학생처럼 딸아이가 나에게 터덜터덜 걸어온다. ‘뭔가 또 일이 생겼나 본데, 이번엔 무슨 일일까?’ “나… 왼쪽 눈 아래에 또 다래끼가 난 것 같아. 나이가 들었는데도 왜 아직도 다래끼가 자꾸 나는 걸까? 너무 속상해.”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딸지만, 나이가 들면 괜찮아질 거라 말했던 엄마의 말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한편으로 귀엽기도 한 말이지만, 어쩐지 말 속에 숨어 있는 속상함이 느껴져 말없이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엄마인 나보다도 훌쩍 더 커버린 아이, 이제는 내가 안아준다는 느낌보다는 자신이 폭신한 곰 인형 안듯 엄마를 안는다. 딸의 말처럼 이렇게나 컸는데 왜 아직도 계속 도돌이표인 걸까? 사실 5살 때부터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부모인 우리도 경험이 없어서 처음에는 금방 나을 거라는 생각으로 방치했더니 많이 딱딱해져서 시술까지 해야만 했었다. 겁을 먹어서 덜덜 떠는 그 어린아이의 몸을 꼭 붙들고 서로 엉엉 울며 보내야만 했던 시술 시간. 그런 경험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우리는 늘 불안한 마음을 가져야만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관계의 혈류: 말하지 못한 감정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다 알 것 같은 사이가 있다. 이렇게 가까운 관계일지라도 사소한 말 한마디로 때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모두 이해해줄 것 같은 든든했던 관계, 그러나 그런 나의 믿음과는 달리 예상치 못한 상대의 반응에 당황할 때가 있다. 길지 않은 그 진공의 시간들 속에서,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불편한 간극이 존재했던 것일까? 오늘 오후 전화로 대화를 하던 중, 그의 말 한마디가 나의 감정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 순간 나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있었다. 급격하게 차가워진 온도를 서로 확인하는 순간 침묵이 흐르고, 어색한 긴장감마저 감돌게 된다. 그가 한 말 그 자체는 그리 어렵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말이 아니었지만, 내 마음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의 실수도, 그의 실수도 아닐 수도 있었을 단어의 조합, 문장이었겠지만, 유독 내 기분을 힘들게 한 이유, 그 감정의 끝을 잡고 기억을 더듬어본다. 누구에게나 건들지 말아야 할 역린(逆鱗)이 있을까? 사이가 멀어졌던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그 역린을 건드린 일